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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풍수지리 이론에 따른 명당설계의 실례를 설명하였습니다.
혹시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유익한 자료이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책을 집필하신분에게 사전 동의없이 게재하게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단지 풍수에 관한 기대와 호기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좋은 이야기들을 혼자 보기에
너무 아까운 마음에 게재하게됨을 양해하여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제 17 장 풍수지리 이론에 따른 명당설계의 실례
1. 춘천의 한모 씨댁
강원도 춘천시 서면은 예부터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서면에 오래 살고 있는 한모 씨 집안은 H농산의 회장을 비롯해 국회의원과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등 정·재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집안이다.
필자가 이 집을 설계한 것은 1982년경이었다. 서면에서 가장 인물이 많이 나온 집안답게 노적봉 형태를 이룬 주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으며, 서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명당 터였다. 대지 조건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서 동향 집으로 배치했으며, 대문은 서사택에 맞춰 동북쪽에 두었다.
현재의 집은 1996년 개축한 것으로서 구조와 형태는 과거의 설계를 유지하고 있다.
2. 강릉 최모 씨댁
강릉의 최모 씨를 만난 것은 필자가 1981년경이었다. 최씨는 필자에게 설계뿐만 아니라 집터 물색까지 부탁했는데, 당시 필자는 강릉 지세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손쉽게 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필자가 추천한 집은 시내 한복판에 있던 널찍한 대지의 낡은 기와집이었다. 그 낡고 오래된 집을 명당 터라고 추천하자, 최씨는 “아니, 흉가를 명당이라고 하다니?” 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그 집에서는 계속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폐가가 됐을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흉가로 낙인찍혀 있었다.
필자는 이 집이 흉가가 된 원인은 주택 배치와 형태가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땅 자체는 명당이므로 땅의 조건에 맞춰 집을 지으면 틀림없는 명당을 만들 수 있다고 확언했다.
최씨는 흉가라는 것이 다소 꺼림칙했지만 필자의 말을 듣고 그 집을 구입했다. 예전의 이 집은 넓기는 하지만 ㄱ자형으로서 기운이 분산되는 형태였다. 뿐만 아니라 남향 집에 동북향 대문으로 방위도 상극 방위였으며, 마당도 전후 좌우로 분산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는 우선 기운이 모아지는 형태의 설계를 했다. 건물은 그대로 남향 집을 하되, 기존의 서쪽 대로 대신 남쪽 전면으로 진입로를 넓게 만들고 남쪽 대문을 만들었다.
최씨는 이 집으로 이사하기 전, 사업이 부진했으며 집안팎으로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흉가 터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한 후에는 신기할 정도로 매사가 잘 진행되었다. 최씨는 집을 옮긴 후부터 사업이 번창됐을 뿐만 아니라 시의원에도 당선되는 등 좋은 일이 많았다고, 지금도 필자에게 인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3. 서울 서교동 안모 씨댁
이 집을 설계한 것은 1989년이었다. 당시 안모 씨는 이곳에서 20여 년간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을 헐고 3대가 함께 사는 2층집을 건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집터 형태는 동서 길이가 길고 남북 길이는 짧으며, 주된 출입구는 동쪽의 공원이 있는 쪽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건물은 서쪽에, 마당은 동쪽에, 대문은 동북쪽에 배치하여 건물과 대문이 모두 서사택이 되도록 설계했다.
1층에는 거실과 조부모가 사용하는 안방, 부엌과 식당 등을 두었는데, 평면 형태는 건물 중심에 기운이 모이도록 정방형에 가깝도록 배치했다. 그래서 가로 3간, 세로 3간으로 구획하여 중심 부분에 식당을 배치했으며, 1층 현관도 북동쪽에 배치해 안방과 대문이 서사택이 되도록 했다. 계단과 화장실은 모두 주택의 북쪽 구석에 배치하여 내부 기운이 안정되도록 했다.
2층에는 이 집의 젊은 주인 부부의 침실과 서재, 아이들 공부방 등을 배치했는데, 중심 부분에 서재를 두고 서재는 천장을 높게 하여 주택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이도록 했다. 지하실은 창고 및 보일러실과 주차장 등으로 이용하도록 했다.
주택 외부 형태는 중심을 높게 하여 전체적으로 기운이 중심에 모이는 형태를 이루게 했다.
건물 형태는 물론 풍수지리 이론을 적용하여 만든 이 집은 서교동 일대의 아름다운 집으로 손꼽히고 있다.
4. 서교동 정모 씨댁
정모 씨 집의 설계를 앞두고, 당시 정씨 부인은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설계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새 집을 짓는 것은 그동안 살던 집이 좁은 탓도 있지만, 풍수지리적으로 아들을 좋은 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한 집을 짓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를 찾아오기 전에 다른 건축사를 찾아가 설계도면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설계를 마친 집을 내가 다시 설계한다는 것이 도의상 맞지 않아 정중히 거절하자, 부인은 이전의 건축사에게 충분한 사례를 하고 양해를 얻었으므로 꼭 설계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필자는 이전의 설계사에게 사실 확인을 한 후 설계를 시작했다.
이 집터는 도로에 면한 길이는 좁은 반면 깊이는 길었다. 이처럼 땅이 세로로 길고 도로가 좁은 경우에도 전면에 안방을 내는 게 일방적인 배치방법이다.
그러나 필자는 풍수지리 이론에 입각, 도로 쪽에는 주차장과 마당을 설치하고 건물을 후면에 두는 배산임수 원칙에 따라 배치함으로써 이 집을 남서향으로 설계했다. 그리고 1층 전면에는 거실을 두고, 후면에 안방과 주방을 배치했다. 안방을 후면에 둔 것은 후면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2층 중앙에는 서재를 두고, 그 좌우에는 두 아들 방을 배치함으로써 집 안의
중심이 잡히도록 설계했다. 지붕은 모임 지붕 형태로 했다.
정씨 내외는 불심이 매우 깊어 항상 자녀들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새 집으로 입주한 지 2년 후 아들이 서울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5. 서초동 이모 씨댁
서울 서초동은 강남에서도 비교적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전무직을 맡고 있는 이씨는, 젊은 시절에는 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부인과 자녀 하나를 두고 있어 비교적 식구가 단촐한 이씨는, 설계를 의뢰할 때 지하실에 차 두 대만 주차시킬 수 있는 주차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음악실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대지 조건은 야트막한 언덕 위의 정방형 대지로서 북쪽으로 도로와 접해 있고, 지면은 남쪽과 서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대지 조건이 이러했으므로 주택은 동쪽에 두고 서향으로 배치하는 한편, 대문은 도로가 있는 북쪽에 배치함으로써 건물과 대문이 모두 동사택이 되도록 했다. 또 주택 평면은 전면을 3간으로 구획하고 중심 부분이 돌출되게 하여 강한 기운이 중심에 모이게 했다. 내부 중심에는 크고 넓은 거실을 배치해 이곳을 기운의 중심점으로 했다.
건물 형태나 각 방의 형태는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1:1.7 미만으로 모두 바르게 했다. 건물 형태는 이탈리아풍으로 하고, 벽체 재료는 철근 콘크리트 옹벽으로 하여 그 위에 페인트 칠을 했다. 설계를 하고 난 후부터는 목수가 설계 의도를 정확히 알고 일을 진행해 줘야 하는데, 이 집은 필자의 그러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진행해 주어서 지금도 그 목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주택 내부는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했는데, 준공 후에 건물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울림은 명랑하고 행복한 트럼펫 소리와 같았다.
6. 포항 이모 씨댁
1980년도말, 포항에 살고 있는 이모 씨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풍수지리적으로 점검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집 안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단층 슬래브 집이었던 이씨 집은 배치와 방위가 모두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는 이사를 할 만한 형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집을 헐고 다시 지을 수도 없었다.
필자는 굳이 다시 집을 짓지 않고 개조를 함으로써 명당 형태로 만들 수 있으므로, 증축을 권했다. 이씨는 필자가 말한 대로 주택 방위에 맞춰 한쪽을 증축했다. 이후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고, 얼마 후부터는 이씨의 사업도 번창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불심이 깊은 이씨 부부는 주택의 2층을 증축하여 서재나 기도실로 사용하기 위해 필자에게 설계 자문을 구했다. 필자는 지붕을 원형으로 하되 중심을 높이고 좌우는 낮게 하여, 기운이 중심에 모이도록 설계했다.
일반적으로 둥근 지붕은 공사가 어렵고 공사비도 많이 소요된다. 그러나 이 집을 증축할 때는 값이 저렴하면서 튼튼한 특수 재료를 이용해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들었다.
완성된 2층 서재에 들어서면 천장이 높고 원형 형태라서 매우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층의 특수한 구조는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하고, 심지어는 비싼 값에 팔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금은 아예 외부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고 있다. 2층이 만들어진 후 집안에 더욱 여유가 생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7. 중국집 D
중국집 D를 운영하는 라모 씨가 필자를 찾아온 것은, 강남에서 크게 중국집을 운영하다가 그 건물을 내주게 됨으로써 새로운 터를 잡아 놓은 1990년도였다. 그가 보아 둔 새로운 터란 서울 이태원에 있는 한 호텔 별관 건물이었는데, 이전에는 레스토랑으로 사용되었지만 사업이 부진해 오래도록 비워 둔 곳으로 전체 평수는 200여 평이었다.
라씨가 운영하던 중국집의 음식 맛은 정·재계 고위층 단골이 특히 많을 정도로 이름나 있었는데, 그는 새 터로 옮겨 가서도 사업이 변함 없이 잘되기를 바라며 필자에게 내부 인테리어 설계를 부탁했다.
필자는 레스토랑 안팎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외부의 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내부, 즉 주방과 홀, 대문 등 각 부분의 배치와 방위, 공간 형태 등을 살펴봄으로써 레스토랑이 망하게 된 원인을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그 건물은 남동향이면서 현관이 남에 위치해 있는, 오행상 상극을 이루고 있었다. 또 주방은 본래 현관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북쪽에 있었으며, 홀이 ㄱ자 형태로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레스토랑과 중국집은 음식점으로서 그 기능이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음식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방 위치이다. 주방이 자리를 잘 잡고 있으면 음식 맛이 좋고 모든 일이 순조롭다.
반면에 주방 위치가 좋지 않으면 음식 맛이 없어지는데, 음식점에서 음식 맛이 없으면 제아무리 인테리어를 잘해 놓아도 손님이 들 리가 없다.
망한 레스토랑 터에 중국 음식점을 차려 성공하려면 기존의 대문을 폐쇄하고 다른 자리에 대문을 달아야 했으며, 주방과 홀, 화장실 등 각 부분도 다시 배치해야 했다. 결국 외형만 남겨 놓은 채 내부는 모두 뜯어내고 다시 짓는 것이 되는데, 이렇게 하려면 상당히 많은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라씨는 공사 비용이 많이 들어도 좋다고 하면서, 실내 색깔이나 장식을 완전한 중국식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풍수지리 이론에 입각해 설계를 하는 한편, 라씨와 함께 중국 북경과 상해, 대만 등의 음식점을 돌아보기도 했다.
설계는 다음과 같이 했다. 우선 건물이 남동향 건물이었으므로, 현관을 기존의 남쪽에서 남서쪽으로 뜯어고쳤다. 또 북쪽에 있던 주방을 북동쪽에 두었으며, 홀도 중심에 넓게 두었다. 화장실도 서쪽에 있던 것을 방위에 맞춰 동쪽으로 옮겼다.
공사를 마치자 흉가처럼 보이던 건물이 새롭게 단장되어 전혀 다른 건물이 되었는데, 이후 지금까지 계속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제 18 장 풍수지리 연구과정
1. 남쪽으로 설계한 출입문을 동쪽으로 바꿔 달라던 건축주
건축 설계를 하면서 풍수지리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지 벌써 30여 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신기하게만 여겨졌던 풍수지리의 세계. 그러나 그 신비의 세계를 의심하면서 찾아 들어간 후부터 나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고립되기도 했었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세계를 현대 건축을 한다는 사람이 드나드는 것이 반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던 풍수지리의 세계에서 나는 풍수지리와 현대 건축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에 간 나는 군복무 기간을 마친 후에야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제에 적용할 수 있었다.
처음 내가 일한 곳은 장기인 선생님이 경영하던 삼성건축설계사무소였다. 장 선생님은 대학에서 건축시공학과 재료학 등을 강의하셨으며, 그가 운영하던 삼성건축설계사무소는 사찰과 궁전, 한옥 등 한국 전통 건축물의 문화재 전문 설계사무소였다.
설계사무소에 취직하여 처음 한 일이 일반 주택 설계였다. 처음 해 보는 일인 만큼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설계도면을 완성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건축주가 설계도면을 가지고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설계도면을 펼쳐 놓고 남쪽으로 설계한 출입문을 동쪽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출입문이란 것은 곧 그 집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따라서 출입문 방향을 바꾸게 되면 현관 배치도 바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집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한 사정을 말했지만 건축주는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설계를 해야 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은 그 뒤였다. 얼마 후 다시 찾아온 건축주는 다시 설계도면을 꺼내 놓고 안방과 화장실의 위치를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역시 안방과 화장실 위치만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므로, 전체적인 설계를 다시 해야 했다. 나는 강경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시면 설계를 다시 해야 합니다. 설계로는 하자가 없는 것인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사실 설계를 맡은 사람으로서 그렇듯 설계도면을 몇 차례씩 바꾼다는 것은 가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이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단순히 방 위치만을 바꾸는 경우에는 더더욱 건축주의 의견을 용납하기 어렵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렇게 번거롭게 해 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만,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해서 부득불 변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디 양해하시고 도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건축주의 정중한 사과에도 불구하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과학 발달로 달나라를 가는 시대에 미신과 같은 풍수지리로 건축을 하려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설계도면은 건축주의 요구대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집을 다시 설계하면서 비로소 생각했다.
‘대체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풍수지리가 현대 건축에도 필요한 것인가?’
그 당시엔 풍수지리의 이론이나 그 당위성에 대해 정확히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막연하게 미신으로 의심하면서 풍수에 따르면 ‘좋다’ 혹은 ‘나쁘다’는 생각만을 좇아 가고 있었다.
‘건축에 대한 전문가라면 건축에 관련된 모든 것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풍수지리가 건축에 관계된 이론이라면 풍수지리의 과학성과 미신성의 한계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합리적인 부분은 현대 건축에 적용하고 미신적인 부분은 배척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나는 비로소 풍수지리에 대해 그것이 미신이든 과학이든, 일단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사무실에서 나의 주된 업무는 문화재관리국의 용역 업무로서, 경기도와 경상도에 분산되어 있는 오래된 문화재를 현장에서 실측하여 보수를 위한 설계서와 보수공사비 내역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있는 경판고의 소방 시설이나, 경주 지역 문화재 주변에 철재 울타리나 담장을 설치하기 위한 현지 측량과 공사설계도 작성 등이 당시 내가 치른 일들 중 일부이다.
문화재를 조사하고 설계하면서 나는 ‘우리 조상들은 왜 풍수지리에 의해 건축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풍수지리를 공부해야 했다. 풍수지리를 알아야만 우리 건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당시엔 건축과 풍수지리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혼자 풍수지리에 관한 책을 뒤적이는 게 전부였지만, 건축과 풍수와의 관계를 시원하게 답해 주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이후 나는 미군 극동지구 공병단(U.S. Army Engi-neer Distric Far East)으로 들어가 건축기사로 일하게 됐다. 이곳에서는 과학적이며 철저한 미국식 설계와 시공법, 합리적인 현장운영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또 전라북도 이리시에 있는 수출공단을 세울 때는, 일본인들과 함께 공단 내부에 건설되는 공장의 현장 감리로 근무하면서 일본의 선진 건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선진 외국인들과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과 당당하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함께 우리 고유의 문화가 있어야 하며, 우리만의 건축 문화를 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2. 전통 건축과 풍수지리의 관계
1973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에 입학하면서 나는 연구 분야를 ‘전통 건축’과 ‘풍수지리’로 정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나갔다. 실무에서 느낀 그동안의 것들을 이론적으로 확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풍수지리에 관한 문헌들을 조사했다. 어려운 한문과 일본어로 된 자료들을 조사하기 위해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서정주 선생(경기고 13회)을 독선생으로 모셨다. 그러나 풍수지리 이론에 대한 타당성과 미신성의 한계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석사 학위 논문을 작성할 때까지도 풍수지리 이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지,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을 정도였다.
과연 문헌에 나와 있는 대로 명당이라는 것이 실재하는가? 산소 자리에 의해 후손이 발전하거나 망한다는 것은 사실인가? 건물에도 명당과 흉가가 있으며, 집의 기운에 의해 그곳에 사는 사람이 발전하거나 불행하게 될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것들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당시 유명하다는 지관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론과 실생활과의 합일성에 대해 직접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여러 선생으로부터 동양철학을 사사하면서 동양철학을 통해 풍수를 해석해 보기도 했다.
아산 김병호 선생으로부터는 《주역》을 배웠다. 한 평생 《주역》만 공부하신 아산 선생은 야산의 제자로서, 그동안 단편적으로 공부한 동양철학의 진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셨다. 특히 《주역》의 괘사(卦辭)와 효사(爻辭)에 대한 해석은 매우 심오하여 나뿐만 아니라 수강생들이 모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다. 아산 선생은 나에게 중산(中山)이라는 호를 내리셨는데, 그것은 곧 시간의 중심을 잡고 이에 맞춰 움직이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이런 공부들이 매우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풍수 이론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하남(河南) 장용득(張龍得) 선생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하남 선생은 지세를 분석하는 나름의 방법을 갖고, 음택이나 양택을 분석하는 체계를 갖고 있었다. 하남 선생의 이론으로 임의의 음택을 정해 풍수를 분석하고 그의 후손에게 확인한 결과 신기하게도 그것이 적중했다. 이런 과정을 몇 차례 거치고 나서 나는 비로소 풍수지리 이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으며, 그 확신을 갖고 석사 학위 논문인 <풍수지리와 건축 계획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서 풍수지리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다.
이후 석사 과정을 마치고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나는 틈만 나면 풍수지리에 대한 이론을 연구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다. 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하남 선생과 그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전국의 수많은 산소들을 찾아다녔다. 지세를 분석하고 산소에 의한 후손들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지세 분석 이론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양택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의 생가와 그들이 거주하던 집,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잘되는 집안을 찾아보고 이곳의 지세와 건축적인 요소에 대한 이론을 분석했다.
흉가에 대한 조사는 신문에 흉사가 보도된 집들을 방문하여 조사했다. 금당 살인 사건(1970년대말 서울 인사동 골동품점 ‘금당’의 주인 내외와 운전수 유괴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살해당한 사람이 살던 집과 범인이 살던 집 등을 찾아가고, 토막 사건이 일어난 집, 빚쟁이를 죽여 정화조에 숨긴 집, 어린이가 유괘된 집, 일가가 교통사고로 죽은 집 등등,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는 즉시 달려가 그 집의 풍수지리를 조사했다.
흉가 현장에서는 지세, 건물 형태와 방위, 내부 구조, 도로와의 관계, 대문의 위치와 방위, 주변 건물들의 조건 등을 조사했다.
이렇듯 흉가를 찾아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 한번은 서울 혜화동에 사는 한 학생이 친구들과 다투다 칼에 찔려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는데,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학생이 살던 집으로 가 보았다. 집은 아담한 일본식이었다. 골목 입구에서 봤을 때는 벽이 지붕까지 솟아 매우 높게 보였으며, 그 형태는 마치 칼과 같이 뾰족했다. 나는 이 집의 내부 구조와 죽은 학생이 이 집에서 언제부터 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주인이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집의 풍수지리를 조사하러 왔습니다.”
딴에는 정중하게 말한다고 했는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사람은 내 멱살을 잡고 위로 번쩍 치켜올리더니 내동댕이쳤다.
“남의 귀한 아들이 죽었는데 재수 없이 조사는 무슨 조사야!”
그러더니 쓰러져 있는 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나는 내동댕이쳐진 카메라와 가방을 주워 들고 정신없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은 상황에서 풍수니 뭐니 하면서 찾아온 사람을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사람이 죽은 집을 조사할 때는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일어나는 듯해서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풍수지리 이론은 그야말로 이론에 갇혀 있게 될 텐데.
하지만 현장에서 명당과 흉가의 원인을 밝혀낼 때의 그 신비와 감탄은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일이다.
3. 음택의 명당 자리에 땅을 파고 살다
음택과 양택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자, 그렇다면 음택의 명당 자리에 음택과 동일한 구조를 하고 그 속에서 사람이 생활한다면 어떤 기운을 받게 될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것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79년, 나는 서울 근교에 있는 사능 뒤편의 산 1,300평을 구입했다. 이곳은 주산과 청룡, 백호, 수구 등이 모두 갖추어진 보기 드문 명당이었다. 나는 이곳의 혈 자리에 묘자리와 같은 1.5미터 넓이로 땅을 파고 초가를 덮어 반지하의 움막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낮 동안에는 사무실이 있던 반포에서 근무를 하고, 밤에는 그곳 움막집에 가서 잠을 잤다.
산 사람이 무덤을 파고 그곳에 드러누워 밤마다 잠을 자다니…. 아마 모두들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풍수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움막을 나오려고 하는데 산이 떠나가도록 커다란 확성기 소리가 진동했다.
“너는 완전 포위됐다.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항복하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니, 동도 트기 전인 꼭두새벽에 청룡과 백호의 능선 위에는 총을 든 수많은 군인들이 움막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삼엄한 경비하에 파출소로 끌려가 신원이 밝혀진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 움막을 지어 놓고 밤마다 들어와 잠을 자고 나가니까 군인들이 나를 간첩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나를 생포하려고 꽤 많은 군인들이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포위 작전까지 펼쳤다는 말을 듣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사전에 신고를 하지 않은 잘못은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신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집과 사무실로 연락이 되었는데, 이후 친지나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특히 아내와 친지들은 밤마다 산속에서 잠을 자고 다니는 나를 보며, 혹시 정신이상이라도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얼마 후 나는 하는 수 없이 조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움막 생활을 청산했다.
이 명당 자리는 이후 박정희 정권 당시의 최고 실력자에게 팔았는데, 그의 선친 산소를 이곳에 쓴 후 그 집안은 다른 정치가들과 다르게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4. 외국에서도 풍수 원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해외건설 붐은 많은 기술자를 요구했다. 그 중에서도 외국 건설공사의 실무 경험이 있는 나는 여러 건설 회사로부터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나는 풍수지리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좋은 조건의 제의도 일언지하에 뿌리쳤다.
그러던 중, 풍수지리 이론이 외국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중국·일본·홍콩·대만·태국·인도·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동남 아시아와 중동 지역,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도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조사를 했다.
런던의 지세를 근교에서 살펴볼 때의 일이다. 하나의 큰 산맥이 능선을 이루며 런던 시내 중심지로 연결되어 있어, 그 용이 연결된 지역을 계속 따라 내려갔더니 세인트 메리(ST. Merry)라는 큰 성당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성당 주변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공동묘지 한쪽에는 비석이 산더미같이 많았다. 성당 가까이에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묘지는 이장하고 비석만 별도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성당 주변을 살펴보니 지세가 명당임에 틀림없었다.
천주교 성당 하실(下室)은 최고의 묘지로서 업적이 많은 신자의 묘지로 사용되며, 그 외의 일반 신자들은 교회 주변에 매장하는 것이 천주교식 장례법이다. 성당 위치가 명당이면 성당의 지하실이나 그 주변에 묘를 쓰는 신자들도 명당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세인트 메리 성당의 지세가 명당이므로, 성당 주변에 있는 묘지 역시 명당의 기운을 갖고 있다. 따라서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성당에 열심히 다니면 죽고 나서 명당에 묻히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신부들이나 서양 사람들이 풍수지리를 모를 텐데 어떻게 명당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생각하기로는 성당을 신축할 때 좋은 터를 잡기 위해 많은 신부들이 오랜 기간 정성들여 기도를 하는데, 이러한 기도 덕택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는 지관이 다른 어느 직업보다 고귀하고 소득이 높은 직업으로 존경받는다. 이들 나라에서는 장례식이 최고급으로 이루어지는데, 고인의 유산을 모두 장례비에 사용한다 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것이 곧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례식의 모든 절차는 지관이 담당한다. 따라서 지관에 대한 예우가 매우 높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여행을 하던 중 스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호텔 주변에 있는 아담한 주택이 눈에 띄어 지세와 함께 패철로 그 집의 방위를 분석해 보았더니, 동향 집에 동향 대문이었다. 그때 마침 그 집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풍수지리를 조사하기 위해 방위를 보았다고 말하고, 집안 내력을 물어 보았다. 지세와 방위 분석 결과로는 그 집에 아들이 없다고 나왔는데, 역시 그 집엔 아들이 없었다. 이러한 작은 사실을 통해 풍수지리 이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5. 풍수지리를 주제로 한 최초의 박사 학위
1983년, 나는 다시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미신으로 생각하기 쉬운 풍수지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학문의 대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였다. 풍수지리를 학문화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고유한 사상을 점차 잃어버릴 것이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연구 방향은 풍수지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공학적인 건축 이론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음택과 양택의 풍수지리 현장 답사를 많이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세를 분석하는 작업은 풍수지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만약 지세를 분석하는 능력 없이 풍수지리를 연구한다면 이것은 핵심을 잃은 학문이 된다.
그렇다고 풍수지리를 과거의 사상이나, 또는 음택과 양택의 입지 선정의 이론으로만 연구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지관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세를 분석하는 능력은 물론, 풍수지리 이론에서부터 현대 건축을 만드는 새로운 건축 이론과 방법을 정립하는 것이 곧 나의 주된 연구 목적이 되었다.
운영하던 설계사무소 문을 닫고 연구에만 전념했지만, 학문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그동안 학위 논문의 대부분이 미국이나 일본 등 외국에서 연구된 자료의 일부분을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로, 일부에서는 미신으로까지 생각하고 있는 풍수지리를 건축학과 접목시켜 연구한다는 것 자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동안 연구한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교내외 학술 발표회는 물론 교수와 선후배들에게 풍수지리 철학과 합리성, 그리고 풍수지리 연구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러던 중 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 이상해 교수가 미국 코넬대학에서 풍수지리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교수를 찾아가 미국에서의 풍수지리 연구에 대한 자료와 함께 그분의 학위 논문을 여러 권 구입하여 학교 교수들에게 보였다.
이를 통해 학교측에서는 풍수지리에 관한 학위 논문을 심사하는 근거 자료를 갖게 됐고, 비로소 <풍수지리 발생 배경에 관한 분석 연구`─`건축에의 합리적인 적용을 위하여>라는 박사 학위 연구논문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석사 과정 때부터 논문을 지도하던 이정덕 교수를 비롯하여 교내의 다른 두 분의 건축공학과 교수와 타대학의 교수 세 분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물론 성균관대 이상해 교수도 논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국내에서 풍수지리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심사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심사위원들의 지적 사항은 무척이나 엄격하고 철저했다. 자칫하다가는 미신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지 모르기 때문인 듯했다.
3회에 걸친 공개 토론을 비롯하여 3개월간의 긴 연구논문 심사 결과, 드디어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았다. 1987년이었다. 1973년 대학원에 입학해 풍수지리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15년 만에 비로소 풍수지리를 연구 제목으로 하여 국내에서는 최초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나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쁨보다는 미신으로 여기기 쉬운 풍수지리를 연구와 학문의 대상으로 올려 놓았다는 점이 참으로 뿌듯했다.
이후 풍수지리 연구는 설계사무실에서 계속되었다. 풍수지리를 현대 건축의 계획 이론으로 정립하기 위해 연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는 풍수지리와 건축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만이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힘들고 외로운 세월이었다.
지금도 풍수지리와 건축은 나의 끊임없는 연구 대상이다. 지금까지 그 이론으로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것을 나는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6. 풍수지리는 왜 계속 연구되어야 하는가
한국은 오래 전에 풍수지리를 개발했고, 지금도 풍수지리가 가장 발달된 나라 중 하나이다.
풍수지리 이론에는 조상들의 소중한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풍수지리를 미신쯤으로 생각하여 제대로 연구하는 풍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침술은 우리 조상들이 개발한 의술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한동안 서양 의학만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미신시되어 개발되지 않았고, 그 결과 중국과 같은 나라에 비해 학문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풍수지리 역시 우리가 연구하고 개발하지 않는다면 역시 외국보다 뒤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전통 사상인 풍수지리를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역사와 전통사상 확립을 위해서이다. 한국의 역사는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이어졌다. 만일 풍수지리가 연구할 가치도 없는 미신이라면 우리의 역사 역시 미신이라고 부정해야 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해석하고 정립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신도시나 각종 단지들은 모두 일정한 산과 강물 사이의 땅에 자리잡게 된다. 산과 강, 땅은 각각의 기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의 기운을 살펴서 국토를 개발한다면 자연의 기운을 무시하고 개발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셋째, 최근까지 이루어 온 서양의 현대 건축은 비록 기계적·규모적인 면에서는 발전했지만, 인간적인 공간 창조라는 면에서는 실패를 거듭해 왔다. 현대 건축의 실패 원인은 공간을 생명이 없는 물질로 해석하는 서구식 철학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공간을 생명력 있는 기운으로 해석하는 풍수지리의 공간 이론은 그동안의 잘못된 현대 건축 이론을 성공적으로 바꿀 수 있는 귀중한 이론이 된다.
넷째, 1980년대 중반에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최창조 교수가 출간한 《풍수지리와 한국사상》은 그동안 사회 뒷면에 처져 있던 풍수지리를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의 하나로 격상시켰다. 최 교수로 인해, 세계 각국의 지리학계에서는 풍수지리가 지리학을 규명하는 핵심적인 이론이 된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정하고 있다. 전통적인 마을의 입지 조건은 풍수지리로 해석해야만 정확하게 분석되며, 다른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문지리학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풍수지리를 연구할 수밖에 없다.
다섯째, 우리 나라에서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풍습을 갖고 있다. 땅이 턱없이 부족해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화장을 권하지만, 실제 화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산소 자리가 부족하다 보니 좋은 터를 묘지로 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농지로 사용될 수 없는 급한 경사지를 공동묘지로 개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농지로 사용할 수 없었던 땅은 산소 자리로도 쓸 수 없는 땅이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흉지에 조상의 묘를 쓴다면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불안하게 된다. 흉지에 조상을 모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화장하는 것이 효도하는 일이다. 화장을 하게 되면 그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풍수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흉한 땅에 조상의 묘를 쓰지는 않을 것이며, 화장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상 묘를 잘못 써서 오는 개인적 불안이 없어질 것이고, 사회적 불안도 감소될 것이다.
여섯째, 풍수지리는 환경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최근 오염된 하천의 물고기가 기형으로 자라고, 화학공장 주변에 사는 사람이 괘질을 앓는 등 환경 문제가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공기와 물을 깨끗하게 보전해야 하는데, 공기와 물은 곧 풍수이다. 풍수지리 이론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물이 인간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 이론에 담겨진 공기와 물에 대한 선인들의 지혜를 찾아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임응승 신부는 단순히 흙 덩어리로 생각하던 땅 속에 수맥이 흐르고 있어, 그것에 의해 멀쩡해 보이는 집이 흉가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관계를 자세하게 증명했다.
이후 주택이나 아파트의 잠자는 공간 밑으로 수맥이 흐르거나, 산소 자리에 물이 들거나 지나게 되면 그곳에 사는 사람 또는 후손에게 우환이 생긴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됐다. 조상 묘가 잘못되면 후손에게 우환이 생긴다는 것이 점차적으로 증명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수맥이 지나는 곳에 동판을 깔면 수맥이 차단되고, 산소를 이장하거나 화장하면 앓고 있던 질병이 낫는다. 이것은 곧 산소나 집터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사람의 질병을 발생시키므로, 풍수를 제대로 알면 질병을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사업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풍수지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지세가 명당인 곳에 명당 건축을 세운다면 훌륭한 학생들이 배출될 것이며, 사업이 잘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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